쿠이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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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이 리는 하와이의 작곡가이자 가수로, 1932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1966년 림프절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하와이 음악과 미국 본토의 대중음악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I'll Remember You"와 같은 곡들을 작곡했다. 돈 호가 그의 곡을 불러 유명해졌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도 그의 노래를 커버했다. 사후 그의 음악은 하와이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하와이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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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이 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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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쿠이오칼라니 리 |
다른 이름 | 쿠이 리 |
출생일 | 1932년 7월 31일 |
출생지 | 상하이, 중화민국 |
사망일 | 1966년 12월 3일 |
사망지 | 티후아나, 바하칼리포르니아주, 멕시코 |
국적 | 미국 |
직업 | 가수, 작곡가 |
활동 연도 | 1961년 - 1966년 |
장르 | 하와이 음악 |
레이블 | 컬럼비아 레코드, Music of Polynesia |
관련 활동 | 돈 호 더 카나카스 나니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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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쿠이오칼라니 리는 1932년 7월 31일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가수였고, 리는 원주민 하와이인, 중국인, 스코틀랜드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1] 5세 때 어머니가 사망한 후, 상하이 주변의 긴장 고조와 전쟁 위협으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왔다.[2]
하와이에서 카메하메하 학교와 루즈벨트 고등학교에 다녔으나, 서핑을 즐기느라 수업을 자주 빠져 결국 퇴학당했다.[2] 이후 미국 해안 경비대에 입대하여 2년 동안 복무했다.[2] 제대 후 미국 본토로 건너가 칼춤 댄서로 활동하며 로스앤젤레스, 뉴욕, 푸에르토리코 등지에서 공연했고, 에드 설리번 쇼에도 여러 차례 출연했다.[1][2] 뉴욕 렉싱턴 호텔에서 일하면서 훌라 댄서이자 가수인 로즈 프랜시스 나오네 "나니" 레이라니를 만나 결혼했다.[3]
1961년, 카우아이 섬의 클럽과 돈 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클럽에서 활동했다.[4] 돈 호는 리의 자작곡을 부르며 성공을 거두었고, 리 역시 유명해졌다.[1] 1965년 림프절 암 진단을 받았으나,[2] 치료 중에도 공연과 음반 작업을 계속했다.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하고,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공연했다.[2] 1965년 5월, 데뷔 싱글 "Ain't No Big Thing"과 "All I Want To Do"를 발매했다.[2]
1966년 7월, 어린 시절 친구의 도움으로 카메하메하 학교 졸업장을 받았다.[2] 암이 폐로 전이되어 세다스 오브 레바논 병원에서 폐 수술을 받았다.[2] 1966년 8월, 지역 예술가들은 리의 의료비 지원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2] 1966년 10월 18일, 알로하 위크 동안 와이키키 쉘에서 공연했으나, 수술 후 휠체어를 사용하여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2] 1966년 11월, 컬럼비아는 "Rain, Rain Go Away"와 "I'll Remember You"를 발매했다.[2]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라에트릴 치료를 받았으나,[2] 1966년 12월 3일, 티후아나의 과달라하라 병원에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그의 유해는 와이키키 앞바다에 뿌려졌다.[1]
사망 직후, 컬럼비아 레코드는 그의 데뷔 스튜디오 앨범 ''The Extraordinary Kui Lee''를 발매했다.[3] 돈 호는 1968년 12월 3일 와이키키 쉘에서 ''The Kui Lee Memorial Show''를 조직하여 하와이 음악가들을 위한 기금을 모금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73년 콘서트 ''알로하 하와이 위성''의 수익금을 쿠이 리 암 연구 기금에 기부했다. 2009년, 리는 하와이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1. 초기 생애 (1932~1961)
쿠이오칼라니 리는 1932년 7월 31일 중국 상하이에서 부모님이 중국을 여행하던 중 태어났다.[1] 아버지 빌리는 가수였고, 어머니 에델은 가수이자 무용가였다.[1] 리는 원주민 하와이인, 중국인, 스코틀랜드인 혈통이었다.[1] 5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1] 상하이 주변 지역의 긴장 고조와 전쟁 위협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왔다.[2] 하와이에서 카메하메하 학교와 루즈벨트 고등학교를 다녔다.[2] 십 대 시절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습득이 빠르고 언변이 뛰어난 학생으로 평가받았지만, 서핑을 즐기느라 수업을 자주 빠져 결국 퇴학당했다. 이후 미국 해안 경비대에 입대하여 2년간 복무했다.뉴욕 렉싱턴 호텔의 "하와이의 방"에서 나이프 댄서, 안무가로 일하던 중,[3] 훌라 댄서 로즈 프랜시스 나오네 레나니(애칭: 나니)를 만나 결혼했다.[4] 나니는 리와 함께 하와이로 돌아와 돈 호와 허니(Honey's)에서 같이 일했다. 둘 사이에는 와일라나, 마헤알라니, 마일, 키모 등 네 자녀가 있었다.
1961년, 리는 카우아이 섬의 클럽과 돈 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클럽에서 일했다.[5]
2. 2. 음악 활동 시작과 결혼 (1961~1965)
쿠이 리는 해안 경비대 복무를 마친 후, 미국 본토로 건너가 칼춤을 추는 댄서가 되어 로스앤젤레스, 뉴욕, 푸에르토리코 등지에서 활동했다.[1] 경험 많은 사모아 댄서들을 보면서 춤을 배웠고, 여러 차례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다.[2] 뉴욕 시티의 렉싱턴 호텔에서 일하면서, 리는 그의 아내인 훌라 댄서이자 가수인 로즈 프랜시스 나오네 "나니" 레이라니를 만났다.[3]1961년, 리는 카우아이 섬의 나윌리윌리 비치 공원에 있는 클럽 제티에서 공연하는 일을 얻었고, 카네오헤의 허니 클럽에서 문지기로 일했다.[4] 클럽 주인의 어머니가 소유한 이 클럽의 대표 가수인 돈 호는 리의 자작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Ain't No Big Thing Bruddah", "The Days of My Youth", "I'll Remember You"를 공연하며 성공을 거두었다.[1] 리는 호에게 허니 클럽에서 가수로 공연하도록 설득했다.[5] 그는 또한 1965년 동안 라하이나의 칼리아 가든과 카나카 피트에서도 출연했다.[5] 10월까지, 리는 와이키키의 퀸스 서프 클럽에서 공연하고 있었다.[6] 그 무렵, 그는 "Lahainaluna"와 "One Paddle, Two Paddle"을 작곡했다.[1]
리는 클럽 공연으로 주당 2000USD를 벌었다. ''태평양의 낙원''과의 인터뷰에서 호놀룰루 라디오 DJ 할 루이스는 리에 대해 "쿠이는 그의 작곡만으로도 금광과 같습니다. 그의 음악은 그에게 1,000만에서 1,500만 달러의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당장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 리는 Music of Polynesia의 자회사인 팜 레코드와 5년 계약을 맺었다. "I'll Remember You"는 호의 데뷔 스튜디오 앨범인 ''Don Ho Show''에 수록되어 Reprise Records에서 발매되었다. 호의 성공은 하와이에서 리의 지역 인기를 높였다. 다른 아티스트들은 곧 이 노래를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그리고 타갈로그어로 녹음했다. 토니 베넷, 앤디 윌리엄스, 허브 알퍼트 & 더 티후아나 브라스, 그리고 빅 숀은 영어로 이 노래를 커버했다.
2. 3. 전성기와 암 투병 (1965~1966)
쿠이 리는 1965년 림프절 암 진단을 받았다.[2] 건강 문제를 알고 있었지만 의사 진찰을 미루다 퀸즈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2] 치료 중에도 1965년 3월 샌프란시스코의 보라보라 클럽에서 공연했고, 컬럼비아 레코드와 녹음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2] 1965년 5월, 데뷔 싱글 "Ain't No Big Thing"과 "All I Want To Do"를 발매했다.[2]어린 시절 친구 더글러스 모스만의 도움으로 1966년 7월 카메하메하 학교 졸업장을 받았다.[2] 같은 달,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치료를 시작했으나 암은 폐로 전이되었다.[2] 이후 세다스 오브 레바논 병원에서 폐 수술을 받았다.[2] 1966년 8월, 지역 예술가들은 리의 의료비 지원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었다.[2]
1966년 10월 18일, 알로하 위크 동안 와이키키 쉘에서 공연했으나, 수술 후 휠체어를 사용해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2] 군중에게 사과하고 일화를 이야기했으며, 아내 나니 리가 그의 신곡 "The Intangible Dream Came True"를 불렀다.[2] 1966년 11월, 컬럼비아는 "Rain, Rain Go Away"와 "I'll Remember You"를 발매했다.[2]
결국,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금지된 라에트릴 치료를 위해 멕시코 티후아나로 갔다.[2] 코발트 치료와 방사선 치료 대신 라에트릴을 선택했다.[2] 1966년 12월 3일, 티후아나의 과달라하라 병원에서 사망했다.[1] 그의 유해는 와이키키 앞바다에 뿌려졌다.[1]
2. 4. 사망과 유산
그가 사망한 직후, 컬럼비아 레코드는 1966년 12월 리의 데뷔 스튜디오 앨범인 ''The Extraordinary Kui Lee''를 발매했다.[3] 1970년, Music of Polynesia는 리의 녹음을 더블 앨범 ''The World of Kui Lee''(MOP 12000)로 발매했는데, 첫 번째 디스크는 ''Words And Music''이었고, 두 번째는 ''Images Of Kui's World''였다.[4][5] 이 레이블의 발행인인 미키 골드슨은 리가 하와이 음악의 세대 차이를 좁혔다고 칭찬했다. 그는 또한 리의 사망 이후 "하와이 작곡가들의 새로운 물결"의 미래에 대해 ''빌보드''에 우려를 표명했다. 하와이 르네상스의 일부였던 그의 팬들은 그를 전통 음악의 주제에서 벗어난 "반항아"로 여겼다. 인터뷰에서 리는 경력 초기에 본토에서 공연하는 동안 하와이 문화에 대한 주류의 고정관념과 섬에서 그의 동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격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모든 상업적 쓰레기는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와이로 돌아온 리는 이전에 선호했던 정장과 넥타이를 버리고 캐주얼한 셔츠를 선호하는 한편 머리를 길렀다. 1966년 6월, ''The Honolulu Advertiser''에 실린 여론 조사에서 그는 하와이 청소년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리의 추종자들은 그를 제임스 딘에 비유했는데, 그의 여러 곡의 주제가 사회적 기만과 과두 정치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저자 아드리엔 L. 캐플러에 따르면, 리의 사운드는 "편안한 영어 발라드 스타일로, 화성적으로나 리듬적으로 복잡한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재즈, 블루스, 그리고 로큰롤과 고전적인 하와이 음악의 혼합으로 구성되었다. 리는 본토에 머무는 동안 당시 유행하던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돈 호는 1968년 12월 3일 와이키키 쉘에서 ''The Kui Lee Memorial Show''를 조직했다. 이 자선 콘서트는 하와이 음악가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금했다. CBS는 1969년 2월 7일에 이 쇼를 방송했다. 리의 "I'll Remember You"를 1966년 여름에 커버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1972년부터 1976년 여름까지 라이브 세션에 이 곡을 포함시켰다. 1973년, 그의 콘서트 ''알로하 하와이 위성''의 수익금은 쿠이 리 암 연구 기금에 기부되었다. 이 기금은 75000USD를 모금했다. 하와이 신문 칼럼니스트 에디 셔먼은 이 행사에 앞서 하와이 대학교의 암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이 기금을 만들었다. 1986년 12월, 셔먼의 뮤지컬 ''Kui''가 호놀룰루 커뮤니티 극장에서 개막했다. 원래 셔먼은 영화 시나리오를 각색했지만, 결국 연극으로 결정했다. 이 연극에는 쿠이 역의 키모 카호아노와 나니 리 역의 숀 갈리포가 출연했다.
2000년 5월, 나 호쿠 하나하노 평생 공로상이 사후에 리에게 수여되었다. 호가 시상했으며, 리의 아내와 딸들이 상을 받았다. 2009년, 리는 하와이 녹음 예술 아카데미에 의해 하와이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림프절 암으로 투병했던[2] 그는 티후아나의 과달라하라 병원에서 1966년 겨울에 사망했다.[1] 향년 34세. 유해는 와이키키에 뿌려졌다.
1973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알로하 프롬 하와이』[6] 라는 자선 콘서트를 열어 75000USD의 수익을 "쿠이 리 암 기금"에 기부했다. 이 콘서트에서 불린 것으로 인해, 엘비스 버전의 『I'll remember you』 (스튜디오 녹음, 영화 『스피노트』사운드트랙 (Spinout) 내의 보너스 곡으로 발매는 1966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나니 리 메도우도 암으로 2008년 봄에 사망했다.
3. 음악적 영향과 평가
쿠이 리의 음악 스타일은 미국 본토의 대중음악과 하와이 음악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재즈, 블루스, 로큰롤과 고전적인 하와이 음악이 섞여 있었다.[4] 그는 본토에 머무는 동안 당시 유행하던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았다.[5] 그의 팬들은 그를 전통 음악의 주제에서 벗어난 "반항아"로 여겼다.[6] 리는 경력 초기에 본토에서 공연할 때 하와이 문화에 대한 주류의 고정관념과 섬에서 그의 동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분노하여 "이 모든 상업적 쓰레기는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1966년 6월, ''The Honolulu Advertiser''에 실린 여론 조사에서 그는 하와이 청소년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제임스 딘에 비유했는데, 그의 여러 곡의 주제가 사회적 기만과 과두 정치를 다루었기 때문이다.[5] 아드리엔 L. 캐플러에 따르면, 리의 사운드는 "편안한 영어 발라드 스타일로, 화성적으로나 리듬적으로 복잡한 실험을 했다"고 한다.
돈 호는 1968년 12월 3일 와이키키 쉘에서 ''The Kui Lee Memorial Show''를 조직했다. 이 자선 콘서트는 하와이 음악가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금했으며, CBS는 1969년 2월 7일에 이 쇼를 방송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1973년 콘서트 ''알로하 하와이 위성''의 수익금 75000USD를 쿠이 리 암 연구 기금에 기부했다.
2000년 5월, 나 호쿠 하나하노 평생 공로상이 사후에 리에게 수여되었다. 2009년, 리는 하와이 녹음 예술 아카데미에 의해 하와이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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